한양도성길 트레킹 3부 (흥인지문구간-낙산구간)

김평진 기자

pyounginkim@naver.com | 2023-04-11 20:40:21


[뉴스써치] 새해 첫날 필자는 ‘한양도성길’ 총 6개 구간 중 백악구간, 인왕산구간, 숭례문구간, 남산(목멱산)구간 트레킹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오후 4시 장충체육관에서 ‘한양도성길’ 다섯 번째 구간인 ‘흥인지문구간’ 트레킹을 시작했다.  

‘한양도성길 흥인지문구간’은 장충체육관에서 신당동, 장충동 주택가를 지나 광희문을 통과한 후 동대문역사문화공원, DDP를 지나 흥인지문(동대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필자는 신당동 주택가로 접어들어 천주교 신당동성당을 지나는 등 신당동과 장충동 주택가를 한참 동안 걸었다. 이 지역은 1930년대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이 일대에 문화주택단지를 조성하면서 한양도성의 상당 부분을 훼손하였고 성벽이 철거된 곳에 주택가가 들어서 있다. 신당동 주택가 끝부분에 ‘광희문’이 있는데, 필자는 오후 4시 10분에 광희문에 도착하였다. 

 

광희문. ‘광희문(光熙門)’은 한양도성의 동남쪽에 있는 문이다. 광희문은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서 시구문(屍口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리웠다. 일제강점기에 일부 무너지고 1960년대에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원 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현 위치에 중건하였다. 광희문 밖은 장례 노제 장소였기 때문에 무당집들이 많아 ‘신당리(神堂里)’라고 불렸는데 갑오개혁 이후 지명의 한자를 바꿔 ‘신당리(新堂里)’로 개칭하였다. 현 ‘신당동(新堂洞)’의 명칭이 여기서 유래한다. 


‘광희문(光熙門)’은 한양도성의 동남쪽에 있는 문으로 시체가 나가던 시구문(屍口門)이었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도 출입하기를 꺼리는 문이었는데 왕의 신분으로 인조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예상보다 빨리 한양도성에 접근하자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광희문’은 일제강점기 때 일부 무너지고 1960년대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원 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현 위치에 중건한 것이다.  

필자는 ‘광희문’을 지나 오후 4시 20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원래 ‘동대문운동장’이 있었는데 2007년 동대문운동장을 헐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건립하였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영국의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했으며 2008년에 착공하여 6년만인 2014년에 개장하였다.  

 

한양도성 순성길 바닥 동판. 조선시대 한양도성 안과 밖에는 각각 군사들이 순찰을 도는 순성길이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어영청, 금위영, 훈련도감의 세 군문이 각각 8패씩을 내어 도성 주변을 순찰했다고 한다. 장충동, 신당동 주택가 바닥에는 ‘한양도성 순성길’을 나타내는 바닥 동판이 설치되어 있어 옛 역사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인근에는 동대문시장이 넓게 자리잡고 있다. 6·25전쟁 이후 동대문 일대의 상권은 광장시장을 기점으로 계속 동쪽으로 확대되어 현재는 청계천을 따라 광장시장 · 방산시장 · 동대문종합시장 · 평화시장 등이 늘어서 있는데, 세계적인 의류, 패션산업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동대문시장 중 평화시장에서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가 재단사로 근무했었기에 이를 기념하여 평화시장 인근 청계5가와 청계6가 사이에는 ‘전태일다리’가 있고 이 다리 가운데에는 전태일 열사의 큼직한 반신상이 자리잡고 있다.  

필자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지나 북쪽방향으로 걸어 오후 4시 34분 동대문에 도착하여  ‘한양도성길 흥인지문구간’ 트레킹을 종료하였다.  

흥인지문. ‘동대문(東大門)’은 한양도성의 동쪽 대문으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한다. 현재의 동대문은 조선 후기 고종 때 다시 건축한 것으로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어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한양의 지세는 서고동저(西高東低)라서 동쪽이 낮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는 동대문이 가장 취약하여, 동대문 바깥쪽으로 옹성을 하나 더 쌓았다. 1907년 일제가 한양을 개발한다는 미명하에 동대문 좌우 성벽을 철거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동대문(東大門)’은 한양도성의 동쪽 대문으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한다. 현재의 동대문은 조선 후기 고종 때 다시 건축한 것으로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어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한양의 지세는 서고동저(西高東低)라서 동쪽이 낮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는 동대문이 가장 취약하여, 동대문 바깥쪽으로 옹성을 하나 더 쌓았다. 1907년 일제가 한양을 개발한다는 미명하에 동대문 좌우 성벽을 철거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필자는 동대문(東大門)의 역사적, 건축적 의미를 되새기면서 동대문 누각을 자세히 보며 과거의 지나간 흔적을 상고한 뒤, 오후 4시 35분 동대문에서 바로 ‘한양도성길’ 여섯번째 구간인 ‘낙산구간’ 트레킹을 시작했다.  

흥인지문공원 성곽길. 동대문에서 북쪽으로 성곽을 따라 ‘흥인지문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접근성도 좋고 전망이 좋은 언덕 위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밤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 찾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흥인지문공원’에서 성곽은 낙산 정상까지 남북방향으로 쭉 이어진다. 
 

‘한양도성길 낙산구간’은 동대문(흥인지문)에서 시작하여 이화마을, 낙산 정상, 낙산공원을 거쳐 가톨릭대 뒷길을 지나 혜화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동대문에서 북쪽으로 성곽을 따라 ‘흥인지문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접근성도 좋고 전망이 좋은 언덕 위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밤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 찾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흥인지문공원’에서 성곽은 낙산 정상까지 남북방향으로 쭉 이어진다.  

한양성곽 바깥쪽인 동쪽에는 ‘창신동 봉제마을’이 자리잡고 있고, 성곽 안쪽인 서쪽에는 ‘이화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흥인지문공원 위에서 바라본 동대문 일대. 동대문에서 북쪽으로 성곽을 따라 ‘흥인지문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지대가 높아 동대문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특히 흥인지문공원에서 바라본 동대문 야경은 일품이다. 
 

낙산 성벽 바깥쪽 창신동 일대는 조선시대에 퇴직한 궁녀들이 모여 살았던 곳인데, 1960년대 이후에는 동대문시장에 의류를 납품하는 하청업체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한국 봉제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창신동에는 높이 40m, 길이 200m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는데 대한제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채석장으로 쓰였던 곳이다. 현재는 채석장 아래에서 절벽 위까지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진풍경을 이루고 있다. 

 

‘이화마을’은 낙산 구간 성벽 바로 안쪽에 있는데, 지은 지 오래된 주택이 많고 골목도 좁아 낙후지역으로 손꼽히던 곳이었다. 2006년부터 정부 지원 하에 예술가들이 건물 외벽에 그림을 그리고 빈터에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마을의 이미지가 밝고 화사하게 바뀌었다. ‘이화마을’은 낙산 정상부까지 이어지는데 계단 끝에 오르면 한양도성이 울타리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도성 안에 형성된 옛 마을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다. 
 

낙산 성곽에서 바라본 창신동 풍경. 낙산 성벽 바깥쪽 창신동 일대는 1960년대 이후  동대문시장에 의류를 납품하는 하청업체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한국 봉제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창신동에는 높이 40m, 길이 200m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는데 대한제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채석장으로 쓰였던 곳이다. 현재는 채석장 아래에서 절벽 위까지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진풍경을 이루고 있다. 
 

필자는 낙산 성곽 옆 오르막길을 따라 걸어 오후 4시 50분 이화마을 중심부를 통과하였고 계속 걸어 오후 4시 58분 낙산 정상 인근에 있는 ‘낙산공원’에 도착하였다.  

‘낙산공원’은 ‘서울의 몽마르뜨 언덕’이라고 불리우고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노을과 야경은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낙산공원 바로 아래가 대학로이고 종로 및 을지로 등 서울시내가 바로 손에 잡힐 듯 조망된다. 

필자는 낙산공원에서 10여분 정도 휴식을 취하면서 서울의 풍광을 온몸으로 느낀 뒤 오후 5시 5분 가톨릭대 뒷길로 접어 들었다. 가톨릭대 뒷길은 성벽 바깥에서 걸을 수 있도록 길이 조성되어 있으며, 성벽에 다시 성벽을 쌓아서 상당히 높고 웅장한 모습이 계속 이어진다.  

이화마을 풍경. ‘이화마을’은 낙산 구간 성벽 바로 안쪽에 있는데, 지은 지 오래된 주택이 많고 골목도 좁아 낙후지역으로 손꼽히던 곳이었다. 2006년부터 정부 지원 하에 예술가들이 건물 외벽에 그림을 그리고 빈터에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마을의 이미지가 밝고 화사하게 바뀌었다. ‘이화마을’은 낙산 정상부까지 이어지는데 계단 끝에 오르면 한양도성이 울타리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도성 안에 형성된 옛 마을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다. 
 

낙산 성벽 오른쪽은 성북구 삼선동으로 흔히 ‘삼선교’라고 불리우는 동네이다. ‘삼선교’라는 지명은 예전 동소문로 위에 있던 성북천을 건너는 다리 ‘삼선교’에서 유래하였다. 

가톨릭대 뒷길을 한참 걷다보니 어느덧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 도달하였고 오후 5시 24분 ‘혜화문(惠化門)’에 도착하여 한양도성길 전체 구간 트레킹을 완료하였다. 

한양도성길 ‘흥인지문구간’과 ‘낙산구간’ 트레킹에 걸린 시간은 휴식시간을 포함하여 총 1시간 26분이 소요되었다. 

낙산공원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풍경. ‘낙산공원’은 ‘서울의 몽마르뜨 언덕’이라고 불리우고 있는데, 낙산공원 바로 아래가 대학로이고 종로 및 을지로 등 서울시내가 바로 손에 잡힐 듯 조망된다. 현재 낙산공원은 서울한양도성과 푸른 숲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각광받고 있다 
 

# 한양도성길 트레킹 3부(흥인지문구간-낙산구간) : 장충체육관(15:58) - 광희문(16:10) -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16:20) - 흥인지문(16:34) - 이화마을(16:50) - 낙산공원(16:58) - 가톨릭대 뒷길(17:05) - 혜화문(17:24) 

한양도성길 6개구간 전체 트레킹에 걸린 시간은 점심식사 시간 및 휴식시간을 포함하여 총 9시간이 소요되었고, 전체 트레킹 거리는 21.37km 였다. 

필자는 한양도성길 트레킹 완주 후 대학시절 추억이 깃든 혜화역 인근 대학로 골목으로 이동하여 연탄불고기로 저녁식사 겸 뒷풀이를 한 뒤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였다. 하루 안에 한양도성길 전체구간을 완주하는 일정이라서 조금은 힘에 벅차기도 하였지만 새해 첫날 새로운 다짐을 하는 의미있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양도성길 트레킹 코스 및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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