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 황현 선생 7부, 자결로서 자주독립 염원·독립유공자 추서
매천야록, 오하기문, 갑오평비책, 사해형제, 매천집, 매천시집 등 남겨
양봉규 기자
webmaster@newssearch.kr | 2021-02-27 17:26:30
[뉴스써치] 매천 선생은 생전에 매천야록, 오하기문, 갑오평비책, 동비기략, 사해형제 등 굵직한 작품을 계속 내놓았다.
매천 사후에도 지우들과 문하생들이 매천집(梅泉集)과 매천시집(梅泉詩集)을 연이어 발간함으로써 매천의 폭넓은 작품세계를 많은 사람들이 접하도록 했다.
황현 선생은 그의 역사서 매천야록에서 망국(亡國)의 주요원인으로 정치적(政治的)으로는 국왕(國王)의 무능(無能)과 왕실척족세력(王室戚族勢力)의 횡포(橫暴), 관리(官吏)의 부정부패(不正腐敗)를 꼽았다.
또한 경제적(經濟的)으로는 무원칙(無原則)한 경제정책(經濟政策), 사회적 (社會的)으로는 신분제도(身分制度)의 붕괴(崩壞)와 신분갈등(身分葛藤), 대외적(對外的)으로는 일본의 정치·경제·문화적 침탈(侵奪)을 망국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매천 선생은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정(執政)한 10년이 조선말기에 국정을 쇄신(刷新)할 수 있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마지막 기회였는데 이를 놓쳤다고 한탄했다.
상소운동(上疏運動), 대일민간외교교섭(對日民間外交交涉), 순절투쟁(殉節鬪爭), 의병운동(義兵運動), 의열투쟁(義烈鬪爭), 계몽운동(啓夢運動), 반일운동(反日運動) 등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도 초지일관 나라를 걱정했다.
어떻케 나라를 구할지 고심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조국에 대한 선생의 끊임없는 우국충정이 매우 깊었음을 엿볼 수 있다.
매천야록은 1954년 역사학자인 치암 신석호(痴庵 申奭鎬1904~1981) 선생이 황현 선생 차남 위현을 찾아가 원본과 함께 김택영 선생의 교정본(矯正本)을 확인하였고, 1년후인 1954년 국사편찬위원회(國事編纂委員會)의 한국사료총서(韓國史料叢書) 제1집으로 공개되어 귀한 사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매천 황현 선생의 우국충정에 불타는 절명시를 여기에 옮기면서 선생의 높고 깊은 나라사랑의 절절한 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매천 선생의 절명시 4수(四首) 중에서 우리가 자주 꺼내 읽어본 빼어난 시 3수(三首)를 여기에 싣는다.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나는 새와 들짐승도 슬피 울고]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세상은 다 망하고 말았네]
秋燈掩券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아래 책을 덮고 흘러간 역사를 되돌아보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인간세상 글 아는 자 사람구실 하기 어렵구나]
또 '매천집'은 매천의 문집(文集)으로 원집(元集)은 지우(知友)인 창강 김택영 선생이 1911년 중국에서 주위의 지원금으로 중국 상해에서 발간되었다.
창강 선생이 손수 편집을 맡은 매천집은 시(詩), 론(論) , 설(說), 서(書) 등을 수록한 책으로서 9권 4책으로 되어 있다.
속집(續集)은 1913년 후손이 수집한것을 추가해서 문집을 내게 되었는데 서문(序文)은 중국인 강겸(江謙)이, 권말(券末)의 발문(跋文)은 김택영이, 속집의 권두(券頭) 서문은 황개기(黃開基)가 썼다.
창강 선생은 조국독립을 위해 중국에 망명(亡命)을 해서까지도 조국(祖國)과 함께 매천 황현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매천시집을 직접 발행하는 열의를 보였다는것만 가지고도 두 사람은 우의(友誼)를 넘어 한결같이 조국독립 의지를 끝까지 살려보려는 우국충정의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국내에서의 '매천시집(梅泉詩集)'은 1932년(壬申年)에 보성(寶城)의 박수용상점(朴受容商店)에서 상, 하 두권 연활자(鉛活字) 양장본(洋裝本)으로 발간되어 세상에 나왔다.
1957년 정유년(丁酉年)에 다시 '전주 매천시집(箋註 梅泉詩集)'을 발간했는데 이 때는 매천 선생의 문하생인 담재 김진명(澹齋 金振明1906~1978) 선생이 앞장섰다.
시집 서문은 연당 김정회(淵堂 金정會)선생이 쓰고, 표지 제자는 고당 김규태(顧堂 金奎泰) 선생이 썼으며, 권말 발문은 담재 김진명 선생이 쓰고, 후기는 매천 선생 차남(次男)인 난사 황위현(蘭史 黃渭顯)이 썼다.
동간록(同刊錄)에 같이 이름을 올린 문하생들로는 담재 김진명 선생, 연당 김정회 선생과 함께 석우 김동후(石愚 金東侯), 경암 조용승(敬庵 曺龍承), 후은 김동근(後隱 金東瑾), 향산 이동환(香山 李東煥), 운석 김인덕(雲石 金仁德), 서송 김성덕(曙松 金成德), 성농 조병훈(星農 曺秉勳), 운계 최경휴(雲溪 崔暻休), 이렇케 10인이 힘을 보탰다.
평소 매천 선생을 흠모(欽慕)하고 따랐던 애제자들이기에 사후에도 선생의 뜻을 쫒아 시집을 재발간하면서 기쁜 마음과 함께 만감(萬感)이 교차했을 것이다.
필자 또한 쉽게 범접할수 없는 귀한 '전주 매천시집'을 펼쳐보며 선생의 깊고 높은 기개(氣槪)와 숨결이 담긴 시와 글들을 가슴 깊이 새기며 읽고 있음에 가슴이 벅찰 수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부족한 필자가 애국지사인 매천 황현 선생을 감히 논(論)하고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본다는 구실로 행여 선생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
그러나 주제 넘는 일인 줄 알지만 구한말 주변 강대국들이 호시탐탐(虎視眈眈) 남의 나라를 탐내고 일본의 간악(奸惡)한 침략과 노략질에 나라는 풍전등화(風前燈火) 위기인데도 조정대신들은 이미 썩었고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은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삶은 도탄에 빠진 엄중한 시절 이런 질곡(桎梏)의 시대를 눈여겨 보아왔던 선생이 벼슬도 마다하고 낙향 칩거(蟄居)하며 불의에 대한 것들을 시와 문으로 쏟아내고 임금에게 상소문(上疏文)을 올리며 나라가 바로 서기를 간구(懇求)하며 온힘을 쏟았는데 선생 혼자서 얼마나 화를 삭이며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니 마음이 아플 뿐이다.
결국 경술국치(庚戌國恥)로 한일합병이 되어 나라가 망하자 이에 통분(痛憤)하여 절명시 4수를 써놓고 자결(순국) 함으로써 사대부로서 의(義)와 지조(志操)를 지킨 애국 지사의 풍모(風貌)는 두고 두고 사람들 가슴에 진한 감동과 애국심을 불러 일으켰다.
나아가 뭇사람들 가슴에 항일 투쟁 의지에 더욱 불을 붙여 끝내 일본의 패망(敗亡)을 불러오는데 매천 선생같은 우국지사들의 역할이 지대했다.
죽음으로서 나라 사랑의 길을 택한 선생의 올곧은 삶에 대하여 높은 경외심(敬畏心)과 함께 고개숙여 경의(敬意)를 표한다.
매천 황현(黃玹) 선생과 아우 황원(黃瑗) 선생 모두 우국일념(憂國一念)의 애국자로서 자주독립을 염원했으나 결국 나라는 쓰러졌다. 나라를 잃은 설움에 통분(痛憤)한 나머지 형님은 한일합병이 되는 순간에 자결했고, 아우는 해방을 1년 앞둔 암울한 시기에 스스로 자결했다.
형제 모두가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로 추서(追敍)된 것도 극히 드문 일로서 후손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4대 강국에 둘러 쌓여 불안한 평화를 누리고 있는 우리의 처지에서 보면 매천 황현(梅泉 黃玹) 선생처럼 훌륭한 애국지사들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과 고귀한 삶을 본받아야 한다.
다시는 이 나라 이 강토를 어느 누구도 함부로 넘볼 수 없도록 우리모두가 대오각성(大悟覺惺)하여 꿋꿋한 자세와 확실한 정신무장(精神武裝)으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년년세세(年年歲歲) 평화롭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영원무궁(永遠無窮) 보전할수 있도록 그 각오(覺悟)를 단단히 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며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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