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써치] 오대산 ‘선재길’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월정사에서 출발하여 동피골 등을 지나 상원사까지 이어지는 약 9km의 명품 걷기길이다. ‘선재길’은 전 구간이 아름드리 나무로 덮여 있어 삼림욕을 즐기며 걸을 수 있으며 또한 오대천을 따라 계곡길 트레킹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코스이다.
오대산 ‘선재길’의 시작지점은 ‘월정사(月精寺)’이다. ‘선재(善財)’라는 단어도 화엄경에 나오는 인물 이름이다. 동자인 ‘선재(善財)’는 화엄경에서 지혜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표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월정사(月精寺)’는 서기 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는데, 자장율사는 선재(善財) 동자의 구도행각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뒤뜰에 53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53이라는 숫자는 선재(善財)동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만난 선지식(善知識, 좋은 지도자)의 숫자이다.
얼음이 살짝 언 오대천. ‘오대천’은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에서 발원하여 남쪽방향으로 흘러 월정사 앞을 지난 후 정선군 골지천과 합류하는 평창군의 3대 하천 중 하나이다. 오대천 중 오대산국립공원 지역인 상원사에서 월정사까지 약 9km 구간을 ‘월정사 계곡’이라고도 부른다. 계곡이 울창하여 사철 수량이 풍부하다. 오대천 상류 월정사 계곡은 열목어와 수달이 사는 1급수 지역이다. 아직 겨울이 한참인 1월 중순에 월정사 앞 오대천이 살짝 얼어 겨울철의 풍취를 더하고 있다.
‘선재(善財)’는 53명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천하를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만나 그의 십대원(十大願)을 들었고 그 공덕으로 아미타불의 불국토에 왕생하여 입법계(入法界)의 큰 뜻을 이루었다고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 기술되어 있다.
필자는 2023년 1월 13일 강릉바우길 1구간 ‘선자령 풍차길’을 걸은 뒤, 강릉시내로 이동하여 경포해수욕장의 겨울 밤바다 풍경을 느끼면서 인근 숙소에서 1박을 하였다. 다음 날인 1월 14일 오전에 숙소에서 나와 승용차를 운전하고 강릉시 주문진읍 주문진항, 주문진방파제 등에 들른 후 소금강 계곡 옆으로 난 6번국도를 이용해서 ‘진고개’를 넘었다.
‘진고개’는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와 평창군 대관령면 병내리 경계에 있는 해발 960m 높이의 고개로 오대산 ‘노인봉’ 산행시 들머리로 널리 이용하는 곳이다.
‘진고개’를 넘어 남쪽으로 계속 이동하여 필자는 오전 11시 18분 평창군 진부면 월정사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월정사 천왕문 뒷쪽. ‘금강교’를 이용해서 ‘오대천’을 넘어 월정사 경내에 진입하면 경내 입구에 ‘천왕문(天王門)’이 있고 그 안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자리잡고 있다. 천왕문은 불법을 외호(外護)하는 신장인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전각이다. 월정사 천왕문 앞에는 ‘천왕문(天王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특이하게 천왕문 뒷쪽에도 ‘오대산월정사(五臺山月精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모두 탄허스님이 글씨이다.
필자는 선재길 걷기에 앞서 먼저 ‘월정사’ 경내 산책을 하기로 계획하였다.
‘월정사(月精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로 자장율사에 의해 신라 선덕여왕 때인 서기 643년 창건되었다고 한다. 자장율사는 중국으로 유학하여 산서성 오대산의 태화지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고 이때 문수보살이 자장율사에게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를 전해 준 뒤 신라에서도 오대산을 찾으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자장율사가 귀국하여 찾은 곳이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이며 그곳에 월정사(月精寺)를 창건하였고 오대(五臺) 중 중대(中臺)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五臺山)은 문수보살의 성산(聖山)으로 여겨진다.
월정사는 현대에 와서는 조계종 종정을 4번이나 역임하신 한암스님께서 주석하시며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로 위상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중 1.4후퇴하는 과정에서 아군에 의해 작전상 월정사를 비롯한 오대산의 암자들이 전소되는 타격을 입기도 하였다. 그 후 탄허스님, 만화스님 때 이르러 월정사는 중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월정사 천왕문 내 동방지국천왕. 월정사 천왕문(天王門) 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자리잡고 있다. 사천왕(四天王)은 불법을 수호하는 수미산 중턱에 살고 있는 불법을 외호(外護)하는 신장을 말하며,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있다. 사천왕이 들고 있는 지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월정사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왼손에 비파를 들고 있는 사천왕이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이라고 되어 있다.
필자는 오전 11시 22분 ‘금강교’를 이용해서 ‘오대천’을 넘어 월정사 경내에 진입하였다. 경내 입구에 ‘천왕문(天王門)’이 있고 그 안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자리잡고 있다. 천왕문 앞에는 ‘천왕문(天王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특이하게 천왕문 뒷면에도 ‘오대산월정사(五臺山月精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모두 탄허스님이 글씨이다.
월정사 천왕문(天王門) 옆에는 전통차를 마실 수 있는 건물인 ‘청류다원(淸流茶院)’이 있다. 이 건물은 자연환경과 잘 어우러져 있어 편안한 산사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한다. 필자가 월정사를 방문한 때가 1월 중순이었고 살짝 눈이 내리고 바람도 제법 부는 날씨여서 따뜻한 전통차 한잔을 마시며 몸이 녹이고자 오전 11시 28분 ‘청류다원’에 들어갔다.
‘청류다원’에서 필자는 15분 이상 전통차를 마시면서 고즈넉한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청류다원’의 벽은 투명 통유리로 되어 있는데 차 마시는 공간에서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천왕문과 인근 계곡의 스산한 겨울 풍경은 차가운 현실과 따뜻한 허상이 혼재된 무릉도원과 아귀지옥이 교차하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였다.
월정사 금강루. 월정사 천왕문 뒤편에 ‘금강루(金剛樓)’가 있다. 일주문-천왕문-불이문으로 이어지는 한국사찰의 가람배치에 있어서 월정사는 불이문의 자리에 금강문(金剛門)을 두고 있는데 그 위에 ‘금강루’가 자리잡고 있다. 금강루 2층에는 윤장대가 있고 금강루 누각 1층에 ‘금강문(金剛門)’ 편액이 붙어 있는데 이곳을 통과하여 누하진입(樓下進入)하면 본전 마당이 눈앞에 펼쳐진다. ‘금강문’ 문(門)에는 화려한 색상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부조되어 있다.
필자는 머리 속에서 여러가지 상념과 번뇌의 질곡을 헤집고 다닌 후 오전 11시 45분 청류다원에서 나왔고 본격적으로 월정사 경내 산책을 위해 천왕문 뒤에 있는 ‘금강루(金剛樓)’에 접어 들었다.
‘금강루’ 누각 1층에 ‘금강문(金剛門)’ 편액이 붙어 있는데 이곳을 통과하여 누하진입(樓下進入)하면 본전 마당이 눈앞에 펼쳐진다. ‘금강문’ 문(門)에는 화려한 색상의 금강역사(金剛力士)(밀적금강, 나라연금강)가 부조되어 있다.
월정사의 가람배치는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 식으로 탑(塔)이 있는 본전 마당을 여러 전각들이 빙 둘러싸고 있지만 본전 마당이 워낙 넓다보니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월정사 금강문 밀적 금강역사 부조. 월정사 금강문 문(門)에는 컬러풀한 색상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부조되어 있다. 금강문의 왼쪽에는 ‘밀적 금강역사’가, 오른쪽에는 ‘나라연 금강역사’가 부조되어 있다. 금강역사는 인도에서 문을 지키는 신이었는데 이를 불교에서 받아들여 부처와 불법을 지키는 신으로 자리 잡았다. 금강역사 중 ‘밀적 금강역사’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훔금강역사’라고 한다.
월정사 본전 마당 한가운에 월정사를 대표하는 국보로 지정된 ‘팔각구층석탑’이 있다. 삼국시대에는 사각형의 삼층 모양의 석탑이 유행하였으나 고려시대가 되면서 사각형 평면에서 벗어나 다각형의 다층석탑이 유행하게 되는데,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고려전기에 만들어진 석탑이다.
월정사 팔각구층탑의 꼭대기에는 청동제 풍경장식과 금동제 머리장식이 있어서 장식적으로도 화려함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다만 필자가 월정사를 방문하였을 때 ‘팔각구층석탑’ 보수공사를 하느라 구조물에 덮여 있어서 가까이서 석탑을 볼 수 없는 점이 아쉬웠다.
팔각구층석탑 뒤에 월정사의 금당(金堂, 사찰의 중심건물)인 ‘적광전(寂光殿)’이 있다. 1930년대 기록에 의하면 현재 적광전의 위치에 7불을 모신 ‘칠불보전(七佛寶殿)’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6.25전쟁 때 아군의 작전상 필요에 의해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8년 당시 월정사 주지스님이었던 만화스님이 전각을 중건하였고 이때 전각 내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현판을 ‘대웅전(大雄殿)’이라고 했다. 그 후 탄허스님이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함께 모신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전각의 이름을 ‘적광전(寂光殿)’으로 고쳐 현판을 달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걸려있는 ‘적광전(寂光殿)’ 현판은 탄허스님의 친필이다.
월정사 적광전. 월정사의 금당(金堂, 사찰의 중심건물)은 ‘적광전(寂光殿)’이다. 1930년대 기록에 의하면 현재 적광전의 위치에 7불을 모신 ‘칠불보전(七佛寶殿)’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8년 만화스님이 전각을 중건하였고 이때 전각 내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대웅전(大雄殿)’ 현판을 걸었다. 그 후 탄허스님이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함께 모신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전각의 이름을 ‘적광전(寂光殿)’으로 고쳐 현판을 달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보통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전각은 ‘대웅전(大雄殿)’이라 하고,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전각은 ‘비로전(毘盧殿)’, ‘적광전(寂光殿)’ 또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 일컫는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두루 빛을 비추어주는 존재라는 의미로 ‘대적광불(大寂光佛)’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러한 이유로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佛)’ 또는 ‘적광전(寂光殿)’이라 부른다. 화엄종의 경우 ‘대웅전’ 대신 ‘적광전’을 본당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불로 ‘석가모니불’을 모신 전각에 ‘적광전(寂光殿)’이라는 현판을 거는 월정사는 특이한 경우에 해당된다.
보통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전각은 ‘대웅전(大雄殿)’이라 하고,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전각은 ‘비로전(毘盧殿)’, ‘적광전(寂光殿)’ 또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 일컫는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두루 빛을 비추어주는 존재라는 의미로 ‘대적광불(大寂光佛)’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러한 이유로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佛)’ 또는 ‘적광전(寂光殿)’이라 부른다. 화엄종의 경우 ‘대웅전’ 대신 ‘적광전’을 본당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불로 ‘석가모니불’을 모신 전각에 ‘적광전(寂光殿)’이라는 현판을 거는 월정사는 특이한 경우에 해당된다.
‘적광전’ 뒤에는 월정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의 진영을 모신 ‘개산조각(開山祖閣)’이 있고 그 왼쪽에 ‘삼성각(三聖閣)’이 있다. 다시 삼성각 왼쪽에 ‘수광전(壽光殿)’이 있다.
‘수광전(壽光殿)’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을 말한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서방 극락세계에 있는 부처를 말하며, ‘아미타(阿彌陀)’란 말은 “무한한 수명을 가진”이라는 뜻으로 줄여서 ‘미타(彌陀)’라고도 하며, 한자어로 ‘무량수(無量壽)’라고 한다. 따라서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을 ‘수광전(壽光殿)’, ‘무량수전(無量壽殿)’ 또는 ‘극락전(極樂殿)’이라고 한다.
월정사의 수광전 전각에는 정면에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측면에 ‘지장전(地藏殿)’이라는 다른 현판이 걸려 있다. 한 전각에 서로 다른 두 개의 현판을 거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경우인데, 전각 상단에는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고 전각 중단에는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는 독특한 불상배치로 인해 두 가지 현판을 모두 걸었다고 한다. 현재의 수광전(壽光殿)이자 지장전(地藏殿)인 전각은 1992년 당시 월정사 주지스님이었던 현해스님이 완공했다.
‘지장보살’은 지옥중생을 모두 구제하기 전에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원(願)을 세우고 지옥으로 내려간 보살이다. 지장보살을 모신 법당을 ‘지장전(地藏殿)’이라 하며, 지장보살이 지옥(명부(冥府))의 중생들을 구제하고 있다하여 ‘명부전(冥府殿)’이라고도 한다. 또한 저승의 판관인 시왕(十王)도 보통 지장보살과 함께 모시고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필자는 수광전 전각을 자세히 살펴본 다음 다시 적광전 앞마당으로 돌아왔는데 ‘적광전’에서 ‘팔각구층탑’을 기준으로 마주보는 쪽이며 만월교로 진입할 때 처음 들어서게 되는 장소에 ‘용금루(湧金樓)’가 있다. 1977년 만화스님에 의해 ‘용금루’가 중창되었는데 중창될 당시에는 팔각구층석탑 가까이 있었는데, 1994년 지금의 자리(예전 ‘불이문(不二門)’이 있던 자리)로 옮겼다.
현재의 월정사 가람배치는 1951년 전각들이 모두 소실된 이후 중창하면서 조선시대의 가람배치와는 상당히 다른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필자는 이와 같이 월정사 경내에 있는 수많은 전각들과 탑 등을 둘러보는 산책을 마치고 경내를 빠져나와 오전 11시 55분 선재길 입구에 접어 들었다.
눈이 살짝 내리고 바람이 제법 부는 겨울철에 월정사 경내 산책을 통해 필자는 1,500년 고찰 월정사의 흥망성쇠와 법신불(法身佛)로서의 ‘비로자나불’, 무량수(無量壽) 부처 ‘아미타불’, 현세(現世) 부처 ‘석가모니불’ 등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하며 객관적인 나의 존재를 깨닫는 의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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