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 황현 선생 2부, 구한말 3대 문장가로 이름 떨쳐

양봉규 기자 / 2021-02-22 22:08:04
절명시를 썼던 대월헌(待月軒). 대월헌은 '달을 기다리는 집'이란 뜻이다. 글씨는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선생의 작품이다. 
절명시를 썼던 대월헌(待月軒). 대월헌은 '달을 기다리는 집'이란 뜻이다. 글씨는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선생의 작품이다.

[뉴스써치] 매천 선생은 어릴적부터 언제나 책을 끼고 살았다.


아버지가 구해온 천여권의 책속에 파묻혀 씨름했고 11살의 어린 나이에 구례로 유학을 와서 당시 대학자(大學者)인 천사 왕석보(川社 王錫輔1816~ 1868) 선생의 문하에 들어갔다.


천사 선생과 매천 선생은 대종교(大倧敎) 창시자인 홍암 나철(弘巖 羅喆1863~1916)과 계몽운동가요 성리학자(性理學者)인 해학 이기(海鶴 李沂1848~1909) 선생의 스승과 문우(文友)사이 이기도 하다.


왕석보 선생으로부터 시(詩)와 문(文)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학문을 닦은 소년 매천은 이미 시를 짓는데도 소질이 탁월(卓越) 했다.


매천의 자질을 눈여겨 본 왕석보 선생의 총애(寵愛)를 받으며 시문을 익혔다.


왕석보 선생의 장남 봉주 왕사각(鳳洲 王師覺), 차남 소금 왕사천(素琴 王師川), 3남 소천 왕사찬 (小川 王師贊)과의 2대에 걸친 스승과 제자 사이로 그 인연이 30여 년 동안 이어진 것도 보기 드문 일이다.


왕석보 선생의 누이동생이 매천 선생의 큰어머니인 것도 매천이 구례를 찾은 인연(因緣)의 끈이 아닐가한다.


평소 아들의 자질을 믿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매천은 1875년 서울로 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양명학자로서 강화학파(江華學派)인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1852~1898) 선생을 찾게 되었다.


이건창의 추천으로 매천은 추금 강위(秋琴 姜瑋1820~1884), 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永1850~1927), 무정 정만조(茂亭 鄭萬朝1858~1936) 등과 교유(交遊)하며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황현 선생은 이건창, 김택영과 더불어 조선말 3대 문장가(文章家)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매천 황현은 석정 이정직(石丁 李定稷 ), 해학 이기(海鶴 李沂)와 더불어 호남삼절(湖南三節)로 불리기도 했다.


매천사 입구 창의문(彰義門). 글씨는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선생의 작품이다. 
매천사 입구 창의문(彰義門). 글씨는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선생의 작품이다.

매천 선생은 약관의 나이에 성리학자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거유(巨儒)인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1798~1879) 선생의 장성(長城 ) 고산서원(高山書院)을 직접 찾아가 뵈었다.


기정진 선생은 젊은 매천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고 일념근재배 (一念勤栽培) 방지사해준(放之四海準)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잘 닦아, 온 세상에 그것을 펼쳐라]하며 격려(激勵)시를 손수 지어주었다.


1883년 특설 보거과(特設 保擧科) 초시(初試)에 1등으로 합격했으나 시골출신이라는 이유로 강등시키자 조정의 부패에 낙담하고 회시(會試)와 전시(殿試)마저 포기한 채 낙향하였다.


1886년 구례 간전 만수동(萬水洞) 구안실(苟安室)로 가족이 이주한 후 16년간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여기에 작은 초옥(草屋)인 일립정(一笠亭)을 짓고 살면서 마당가에 매화나무를 심고 그곁에 작은 샘을 파고 검소하게 살았다.


그 무렵 자작(自作)으로 호(號)를 매천(梅泉)으로 지었다.


1888년 아버지의 강권으로 다시 상경하여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하여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 생원(成均官 生員)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사회 혼란중에 탐관오리들의 탐욕(貪慾)과 비리(非理)에 실망하여 벼슬을 마다하고 1890년 다시 구례 구안실(句安室)로 내려왔다.


구례로 낙향한 매천은 3000여권의 서책에 파묻혀 시문짓기와 역사연구(歷史硏究), 그리고 경세학(經世學) 공부와 후진양성에 힘쓴 것은 매천다운 곧은 의지와 처세라 할만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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