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써치] 매천 선생은 평소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신학문(新學問)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누구나 깨어 있으려면 신구학문(新舊學問)을 모두 섭렵(涉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스승 왕석보 선생의 가르침을 본받아서인지 1907년 왕석보 선생 학파를 이루는 황현 선생과 현곡 박태현(玄谷 朴泰鉉1856~1925) 선생 등 후학들이 주축이 되어 호양학교(壺陽學校)를 세웠다.
매천 선생이 앞장을 서고 주민들의 직접적인 참여했다. 재정을 지원해 좋은 일을 도모하자는 취지로 모연소(募緣疏)를 손수 작성하여 지역유림(儒林)과 재력가들로 부터 부족한 운영기금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하여 광의면 지천리 지하마을에 우국과 애국 충절을 근간으로하여 1908년 8월에 사립학교인 호양학교(壺陽學校)가 세워졌다.
호양학교에서는 당시로서는 누구도 생각하기 어려운 지리(地理), 수학(數學)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설립 발기인으로는 운초 왕수환, 지촌 권봉수, 남산 왕재소, 우천 박해룡, 석농 권석호 선생 등이다.
이 호양학교는 담양의 창평의숙(昌平義塾 )과 함께 남한 최초의 사립학교로서 황현 선생의 후세 교육에 대한 선각자(先覺者)로서의 긴 안목과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호양정신은 구례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밑바탕이 되었다.
1919년 3월1일 아우내에서 울려퍼진 기미독립만세 물결이 전국으로 활화산 처럼 타오르자 광의면 지천리 지상마을 출신 박경현(朴敬鉉1859~1923) 선생과 마을사람들이 합심하여 태극기를 직접 만들어 다음날 구례장터에서 사자후(師子喉)를 토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힘차게 불러 만세 할아버지로 소문이 났다.
이런 자발적 항일운동과 자주독립운동이 결국 신간회(新幹會), 금란회(金蘭會) 등으로 조직화되어 항일운동에 앞장서는 기폭제(起爆劑)가 되었기에 항일의식 고취와 신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호양학교가 신학문의 요람(搖藍)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일제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일면일교(一面一校) 운동을 빌미로 광의면 소재지에 공립학교를 세우면서 호양학교는 1920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또한 왕석보 선생의 증손자로 호양학교 출신 왕재일(王在一1904~1961) 선생이 항일비밀결사조직(抗日秘密結社組織)인 성진회(醒進會)를 결성하고, 일제에 항거한 광주학생독립운동(光州學生獨立運動)의 주역인 것도 큰 자랑거리이다.
선조의 강직한 피를 이어받아 의협심(義俠心) 강한 청년으로써 항일운동에 앞장서서 투쟁대열의 선두에 섰던 왕재일 선생은 자긍심(自矜心)이 대단한 젊은 항일투사였다.
2006년 이런 역사적인 호양학교 건물을 다시 복원하여 개방하였다.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예절교육(禮節敎育), 정신교육(精神敎育)의 산교육현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호양학교는 지하마을 입구 우물가 석하 권홍수 선생댁에 있었다. 필자의 집과는 지척의 거리이다. 이곳은 당시 이름난 서당(書堂)으로서 석하 선생이 띄운 운(韻)을 따라 천자문을 외우는 학동(學童)들의 글읽는 소리가 귓가를 쟁쟁하게 울렸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하자 조국광복의 기쁨에 넘친 국민들모두가 거리로 나와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외쳤다. 온나라가 기쁨과 환희에 들떴다.
그 무렵 매천 선생 동생인 석전 황원(石田 黃瑗) 선생과 상동 마을 박준동(朴俊東) 선생이 앞장서서 호양학교 후신인 방광학교(放光學校)를 세우자고 제창하자 모두 환호하였다.
이에 수월리 김종선(金鍾善) 선생이 거금을 출연하였고 각마을 유지들의 십시일반(十匙一飯) 모으고 천은사에서도 학교를 지을 아름드리 나무를 많이 지원하였다.
드디어 1946년 우리나라 국민학교중 한옥 20칸의 웅장한 방광학교를 세워 향학열에 불타는 학생들의 배움터가 되었다.
방광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힘을 보탠 마을 유지들이 있다. 박해영(朴海榮), 권정수(權正洙), 유흥노(柳興魯), 권도수(權道洙), 박해완(朴海完), 양한태(梁漢台), 이용식(李瑢植), 김성동(金誠東), 박해출(朴海出), 석화용화(釋河龍華), 허창섭(許昌燮) 선생 등이 앞장섰고, 석하 권홍수 선생께서 1946년 방광학교 창건역사(創建歷史)를 손수 써서 이를 귀중한 기록으로 남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학생수 감소로 방광초등학교는 1999년 9월1일 폐교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다행히 광의면 출신 정동인(鄭東仁) 전남도교육감의 혼신의 노력으로 학생수련관(學生修鍊館)으로 탈바꿈하였다. 지금도 학교 정문 안쪽에 방광초등학교 출신 명사들의 모금으로 매천 선생의 절명시가 선명하게 씌여진 시비(詩碑)가 우뚝 서있다.
본관 안쪽에는 매천 선생 기념실이 따로 마련되어 선생의 체취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것 같아 흐뭇한 마음이다.
한편 호양학교 내에 있던 동종(銅鍾)은 태극문양(太極文樣)이 양각(陽刻)으로 선명하고 용의 발톱 다섯개가 힘차게 그려져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2011년 12월21일 구례군의 향토문화유산(鄕土文化遺産) 제31호로 지정되었다.
그 동종이 호양학교에서 방광학교로 옮겨져 오래 걸려있다 폐교후 순천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 후 다시 구례교육지원청에 보관되어 오다가 2020년 1월21일 지리산역사문화관(智異山歷史文化館) 매천실(梅泉室)로 이관되어 영구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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